시각예술가 엄정순(1961–)은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새로운 ‘보기’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1996년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한 이후,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본다’는 행위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결과물을 조각, 회화, 출판물 등 다양한 형태로 선보여왔다.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대형
조각 <코 없는 코끼리>도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탄생했다. 코끼리에게
가장 큰 무기이자 그것을 이름 짓게 만든 ‘코’가 사라진
형상 앞에서, 지금까지 학습하며 당연시했던 인식의 구조는 붕괴된다. 텅 비어 있는 코끼리, 즉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근원적인
질문이 시작된다.
기존의 인식 체계를 전복하고 비인간 존재를 탐구하려는 엄정순의 시도는 드로잉과 회화 작업에서도 포착된다.
작가는 인간 중심적인 시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통 방식들이 감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감각적 교류의 세계를 예술로 구현해내는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향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시선을 회복하게 하며, ‘비장애’ 중심, ‘인간’ 중심으로 작동해온 사회에 균열을 일으킨다.
엄정순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후 독일 뮌헨대학교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건국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1996년부터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하여, 맹학교 미술교육 등 출판, 전시, 아트 프로젝트, 예술교육 관련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아트선재센터, 소마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으며, 제 14회 광주비엔날레(2023)에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서울시립미술관(서울), 국립민속박물관(서울), 호암미술관(용인), 삼성문화재단(서울)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